제 6편 우리들의 이야기

제 1 장 하고 싶은 이야기
제 2 장 생활속 신앙 이야기
Title구하라, 주실것이다!2026-03-12 02:17
Name Level 1

나는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카톨릭 신자로 잉태되었다.  남들은 종교의 자유에 의거 고심하며 자신에게 맞춤한 종교를

택하며 시간과 공을 들이는데 나는 종교의 자유도 없이 태어나니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집안에 사제가 나면 3대가 복락을

누린다는데 큰아버지가 마산교구 신부님으로 금경축까지 지내시고 지금은 마산의 성당 묘지에 누워계신다.  뭔지도 모르고 어머니손에

이끌려 성당 문턱을 드나들었어도 뭣이 나에게 복이였는지 글쎄다...  큰아버지는 서울에 명절이나 업무차 오시면 우리집에 꼭 오셔서 내가 

감히 받아보지 못하던 시퍼런 만원권을 주시던일은 환갑이 넘은 이 나이에도 감격이 아닐수 없고 복있는 날, 신나는 날로 기억된다. 신부님 오셨

다고 가정미사를 드릴때면 이웃에서도 함께하며 우리집을 부러워하며 함께 옹기 종기 모여앉아 미사를 드렸고, 성당에서의 미사보다 구석 

한켠에서 바라보던 큰아버지는 어린 나에게는 커다란 분이셨다. 언젠가 마산에 신부님뵈러 부모님과 함께 갔을때 어머니는 부엌정리와 함께

냉장고의 오래된 음식들을 버리려다 호되게 신부님께 야단 맞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교우들이 정성스레 만들어온 음식인데

상했으면 물에 씻어 먹을것이니 절대 버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얼굴 불그레 난감해 하시던 어머니도 그랬지만 혼구멍을 내시던 큰아버지를 

더 잊을수가 없다.


어머니는 늘 콩나물을 기르셨다. 어머니가 콩나물 시루에 물을 연신 쏟아 부우시면 바닥으로 주루룩 흘러내리는걸 왜 저러시나 싶어 조심히

검은 보자기를 걷어 볼때면 노란 고깔의 콩나물들이 쭉쭉 커져 있는것이 참 신기했다.  엄마따라 내가 성당문을 드나듦이 콩나물처럼 헛되지 

않았던것은 아마도 몸에 베인 어린시절의 습관이 고맙게도 일상의 삶으로 인식되었던게 아닌가 싶다. 어머니 덕이다.  우리 3형제 모두는 

큰아버지께서 당신 주례로 명동성당에서 혼배미사로 엮어 이 세상에 내 놓으셨다.  가정을 꾸리고 직장일에 바쁜나날들 중 해외 주재원으로 

말레이지아살때 특별한 기억을 소환해본다.


딱히 시간을 내어 신앙생활을 한다기보다 주일미사와 소소한 봉사활동은 내 삶에서 떼어놓울 수 없는 생활의 일부였다. 해외에 사는 나에게

간간히 큰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주시며 나의 삶을 격려해 주셨고, 늘 기도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쿠알라룸푸르에 100 여명의 한인 공동체가

있었지만 St. John 주교좌 성당에서 로칼미사를 참례해야했고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싱가폴 주재 한인 신부님은 개별적으로 한달에

한번씩 말레이지아에 오셔서 우리 공동체를 위해 꿀같은 한인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지금은 말레이지아에도 춘천교구의 신부님께서 사목을

하고 계신다.


싱가폴에 계시는 신부님은 의붓자식 같은 말레이지아 공동체를 늘 생각해 주셨고 중요 행사도 어렵사리 만들어 주셔서 인원이 얼마 안되었기에

성당에서 행해지는 모든일에는 토를 달지않고 무조건 달려갔던것 같다.  성령 세미나를 3번째 실시할 때였으니 불참해도 되련만 묵묵히 수고

하시는 신부님을 생각해서라도 많은 교우들이 참석해야지 하는 선한 마음으로... 그러나 교만이 스믈거려 뻔하겠지 하면서 참석했던 마지막날

기도중에 "구하라, 얻을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격적으로 가슴에 받아 안았다.


그당시, 나는 군대 제대쯤, 얼마나 강렬했으면 선명하게 기억나는 시간과 때, 스물 일곱 나이 그로부터 시작된 이유를 알수없는 심한 가려움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명하다는 피부과는 다 다녀보고, 대학병원 피부과, 급기야 여북하면 어머니가 날 데리고 간곳은 나병환자 진료소로 유명하던 

영광의원의 약을 처방받아 먹기도 했었다.  약이 독해서 졸음으로 이어지기에 낮에는 먹을수도 없다.  가려움증 이라기 보다는 거의 발작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듯 나만의 비밀스런 고통은 머리 꼭데기서부터 시작하여 어깨, 몸통, 팔다리 거쳐 발끝까지 긁어 온몸에 피가 맺히고 긁힌 자국

으로 녹초가 되고서야 진정이 되고 거의 실신상태로 뻗어 버린다. 미리 약을 먹지 않으면 나로서는 죽음이였다.  결혼하여 이젠 혼자가 아니다보니

아내에게 들통이 나버렸다. 어느결엔게 내가 긁기 시작하면 그녀도 가렵다며 함께 긁으며 사기결혼을 했다는둥 푸념까지 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나를 안스럽게 여겨주는 짝이있어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웃픈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


세미나 마지막 과정에서 기도중, 정작 주님께 나의 고통을 한번도 청하지 않았던 무지가 뒷통수를 때린것이다.  "왜 바보처럼 있는거야?  주님께

고쳐달라고 말하라"는 큰소리가 나의 귀를 울렸다.  절박한 마음과 의심없는 믿음으로 하혈하는 여인이 군중속에서 예수님의 옷자락 이라도

만지면 나을 수 있을것이라는 그녀의 믿음따라, 간절하게 간절하게....  깨우침을 느끼는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였다.  온몸이 전기 에 감전된듯

전율과 함께 치유의 응답이 전신가득, 한없는 기쁨이 나를 감싸 안았다.  흥분된 마음을 가다듬고 있자니,  내 마음을 어찌 아셨는지 신부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 있으면 말해보라 하신다.  손을 번쩍들어 주례 신부님께 "제가 지금 치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하고 고하니 앞으로

나오라 말씀하시고 모든 교우들이 나를 둘러싸 손을 뻗어 안수기도와 심령기도를 해주셨다.  그것으로 나의 가려움과의 전쟁은 끝이였다.


한국에 다녀올때면 무엇보다도 챙기는것이 나의 약이였다. 그약이 없으면 나는 살수가 없고, 낮에 먹으면 졸음 때문에 운전도, 업무도 어려워

늘 잊지않고 밤에 복용하던 그약이 아직도 한 보따리 있었는데 그약에 손이 가지 않았다.  몇일이 지나도, 약을 안먹어도 가렵지 않았다.

그후, 25년이 지났다. 아직껏 가려움은 무소식이다.


올해로 미국살이 10년을 꽉 채웠다. 미국에 오려고 계획을 세워본적도 없고 미국에서 생활할 줄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이제사 뒤를 돌아봅니다.  굽이 굽이 낮설고 물설은 세상 구석 구석 어느곳에서도 그분은 나를 푸른풀밭 시냇가로 인도하셨다는 은총의

삶이였음을, 나의 괴로움을 나의 즐거움을 그분도 함께 겪어내고 계셨음을, 내가 생기기도 전에 그분이 나를 택하셨음을 믿을수 밖에 없음을

믿고 또 믿으며 온몸으로 체험한 그분의 기적과 사랑을 고백합니다.  구하라, 주실것이다!


최민혁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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