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초기 신앙 공동체
세 가족의 만남에서 공동체의 뿌리까지
1. 한국말 고해성사의 염원과 첫 만남 (1976년 9월 ~ 1979년 6월)
타코마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역사는
1976년 9월, 김규동(바드리시오), 황의경(마태오), 박만규 세 가족이 타코마 포틀랜드 애비뉴 소재 세인트 피터 폴 성당에 함께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 효시를 이룹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미국 성당에 다니고 있었으나,
김규동 씨의 수소문과 권유로 한곳에 모이게 되었으며,
이는 공동체 형성의 산파 역할을 했습니다.
- 초창기의 어려움:
당시 교우들은 영어 미사에 참여했으나,
강론 이해와 고해성사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김규동 씨가 손가락 개수로 십계명의 계명을 표시하며 고해를 했던 일화는 당시의 절실함을 잘 보여줍니다.
- 한국어 미사와의 조우:
1977년
1월, 교우들은 시애틀 세인트 에드워드 성당을 찾아 차미도(Richard
Parle) 신부가 집전하는 한국어 미사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첫 영세자와 공동체의 성장:
1977년
4월, 박만규 씨가 워싱턴주 최초의 한인 영세자가 되었으며,
1978년 최영수 신부의 일시 체류를 계기로 교우 수는
2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2. 차미도 신부의 헌신과 본당의 기틀 마련 (1979년 7월 ~ 1983년 7월)
1979년
7월 셋째 주,
차미도 신부가 주일 오후마다 타코마로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면서 드디어 타코마 공동체만의 첫 한인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차미도 신부의 사목 열정:
차 신부는 시애틀 대규모 성당 사목과 여러 단체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시애틀과 타코마의 한인 공동체를 위해
'1인 5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81년
6월에는 스스로 한인 전담 신부를 자청하여 오직 한인 사목에만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 조직의 체계화:
* 사목회 구성:
초대 사목회장 김규동,
2대 황의경,
초대 총무 김광윤 씨 등이 봉사하며 공동체의 살림을 맡았습니다.
- 주보와 안내판:
1981년
8월 제1호 주보가 발행되었으며(당시 손으로 직접 쓰거나 오려 붙인 형태),
같은 해
10월에는 세인트 피터 폴 성당 앞에 최초의 우리말 성당 안내판을 세우는 감격을 맞이했습니다.
- 구역제와 야외 미사:
1981년
11월 타코마 지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1982년
7월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첫 야외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 영적 성장의 열매:
차 신부의 헌신적인 사목 결과,
1982년 부활절에는
18명이 영세를 받았고,
1983년 그가 이임할 당시 교우 수는 약
100가구에 육박하며 공동체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3. 초기 신앙 공동체의 유산:
땀과 정성으로 일군
4반세기
오늘날
1,000여 명의 신자가 모이는 대성당으로 발전한 밑거름은 바로 이 시기 교우들과 사제들의 헌신이었습니다.
- 실천하는 신앙:
차미도 신부는 매년 말 자신의 은행 구좌를
'0'으로 만들 정도로 어려운 교우들을 도왔으며,
교우들은 미사 후 함께 식사를 나누며 끈끈한
'소 공동체'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 역사의 보존:
모눈종이에 정성껏 쓴 주보와 주소록,
누렇게 변색된 초기 명단들은 타코마 한인 천주교회의 소중한 뿌리이자 미래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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