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편 우리들의 이야기

제 1 장 하고 싶은 이야기
제 2 장 생활속 신앙 이야기
Title타코마성당 반세기 역사의 시작2026-03-11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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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타코마성당이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네요. 그때를 생각하면 감개무량 합니다. 젊은 나이에 미국에 와서 이제는 흰머리 날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네요.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광을 갖게 해 주신것 같습니다.  그당시 이민 1세들의 생활은 너무나도 어려운 환경속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나는 노력과 도전정신이 우리들의 많은 고통들을 견디게 한것 같고 그들의 고통이 있었기에 오늘날이 있고 이 모든것은 주님의 뜻과 은총이 였기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족은 타코마 Fort Lewis 에 계신 군종 신부님의 초대로 1976년 2월에 이곳 타코마에 정착하였으며 아무도 모르는 타국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심정이였습니다. 다행히도 설리반 신부님의 도움으로 부대에 계신 장교부인들이 교대로 동원하며 우리가족을 위하여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족은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 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이로인해 우리는 봉사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웠으며 우리도 남을 위해 봉사를 하여야 겠다는 마음을 갖게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한달만인 3월에 타코마 교육청에 심사를 거쳐 고등학교 {Lincoln High School}에 교사로 임명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때마다 영어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통역, 번역등 많은 도움을 드렸으며 심지어 공장에 가서 기계사용법을 번역해 드린적도 많았습니다.  우리가족은이민 오기전 한국에서 미8군 사령부 부관감실에서 문서관리관으로 일을 하였으며 제 아내는 군종감실에서 행정보좌관으로 일을 했었기에 조금은 이민생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링컨고등학교를 등교하면서 한국학생 김세영을 만나것이 인연이 되어 부모님 김규동과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남으로 조그만 소공동체가 하나, 둘 형성됨과 동시에 활성화되었습니다.  한 학생의 만남이 우리에게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1976년부터 약 2년간 교우들의 참여는 많지 않았지만 주말이면 미국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고 미사가 끝나면 중국집 혹은 가정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일주일 동안의 생활을 서로 나누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또한 한달에 한번은 차미도 신부님께서 집전하시는 한국어 미사와 고해성사를 보기위해 씨에틀로 갔습니다.  이렇게 초창기 이민생활은 유럽사람이 어려움을 겪은것과 마찬가지로 이민생활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인 가족들은 개척정신을 발휘하여 이민생활을 하며 주님을 모시고 교우들간 우애를 돈독히 하면서 타코마 한인 천주교회의 반석을 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링컨 고등학교에서 미국역사를 가르치다보니 미국역사가 필수과목이기에 우리 한국 학생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점이 많아 이 문제를 교욱청에 제의하였고 또한 편집자의 승인을 받아 808페이지나 되는 역사책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This is America's Story) 제 아내 황마리아는 한국어로 타자를 찍어 타코마 공립하교는 물론 미국 전 고등학교에 배포하여 한국 학생들의 미국역사 이해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1978년 6월 최영수 요한 신부님께서 로마에서 귀국하면서 미국 성당에 (St. Ann Catholic Church) 6개월 계시는것이 계기가 되어 한인 천주교가 미국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게되었으며 주일학교도 시작하게 됨으로 여러분야의 단체장들의 역할도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1979년 6월 차미도 신부님께서 타코마 공동체를 맡게 되었으며 1980년부터 3년간 사목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부딪쳐야할 벽들이 너무나 많았으며 또한 남의 성당을 빌려쓰는 서러움과 고통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1983년 6월 대전교구 소속이신 조병기 신부님의 부임으로 최초의 한인 본당 신부님을 모시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너무 가난하였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부임해오신 신부님의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1980년에는 워싱턴주 대한 부인회가 운영하고 있었던 한국학교를 천주교에서 인수하여 우리부부는 주중에는 고등학교에서 역사와 영어를 가르치고, 아내 마리아는 버니 국민학교에서 2학년 담임교사로 근무하면서 토요일은 몇몇 교사와 함께 한글을 가르쳤고 학생수는 95명정도 부모님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주일은 미사가 끝나면 성인을 위한 교리반을 맡아 지도하였으며 아내 마리아는 아동 교리반과 첫 영성체반을 영어로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교욱을 시작하기전 우리는 씨에틀 주교관에서 특수 교육울 받고 실행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우리 성당에 수녀님이 오시기 전이였습니다.


또한 우리부부는 1977년부터 낮에는 학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공부하여 워싱턴주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속에서도 우리 아이들은 아무런 불만없이 우리를 도와 주었으며 아이들의 도움과 협조가 없었다면 모든것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겁니다.  자녀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뿐입니다만 고맙게도 큰딸은 장학생으로 유덥을 졸업하고 보잉회사에서 35년간 근무하고 있고 아들은 에드먼드 소재 치과의사로 20년 이상 근무하고 있답니다.  1976년 포틀랜드 성당에 간판을 걸때 찍은 사진속의 아이가 벌써 커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같은 생활. 주님의 은총이 아니겠는지요!


1988년 조장윤 신부님께서 부임하시면서 성전 건축울 추진하였으며 이전에는 씨에틀 교우들과 성전 건축모금 운동을 함께 하다가 중단하고 단독으로 타코마만 새로운 성전건축 위원회를 구성하여 타코마 건축위원장에 황의경 마태오, 기획부장에 김광윤 바오로를 임명하였습니다.  이때만해도 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우리의 본당을 갖고자하는 욕망에 마음이설랬습니다.  남의 본당을 사용해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하여 우리는 많은 서러움과 괴로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열심히 기금 모금활동 결과 1989년 1월 7일 갈망하던 우리의 본당을 마련하였지만 이곳은 작은집, 마굿간 같은곳(Golden Givens Rd)이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다시 개조하고 페인트 칠하고 청소만 하는데 3개월 이상이 걸렸습니다.  우리의 재산과 건물을 구입한것은 교우분들의 정성어린 마음과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신부님을 사제관으로 모시고 미사를 집전하게 되면서 각 분과 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다시 제2의 성전 건축기금 모금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현재 사용하는 정하상 바오로 한인 성당에 오면 감회에 잠기곤 합니다.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민 초창기 신자들의 희생과 봉사정신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못하는 영어로 오이공장, 닭공장, 굴공장, 고기공장, 하루종일 돌아가는 기계속에서 닭을 잘라야 하는 직책, 손목이 아파서 울면서도 미사에 오셔서 기금을 내시는 분, 하루종일 얼음속에서 일을 하시고, 나무공장에서 벌은돈, 아기 봐주고 모은돈을 내주시던 할머니, 추운밤 바다에서 꼴뚜기잡아 성전 건축기금으로 쓰라고 내놓으셨으니 이러한 모든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오늘과 같은 영광을 누릴수 없다고 봅니다.  모든 타코마 교우님께 다시한번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제 우리부부는 25년 교직생활을 은퇴하고 성장한 자녀들의 가정과 건강한 손자 손녀의 재롱 그리고 주님의 은총속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여러분은 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보람있고 부유하게 보내기를 바랍니다. 공동체가 겨자씨처럼 성장하여 둥지가 필요한 사람과 심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황의경 마태오 황정자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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